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문단 편집) === 종합 === 이렇듯 폼페이우스는 그가 가진 정치력의 결여, 그리고 훗날 카이사르와의 대결을 '''군사적'''으로 결판짓고자 하였던 호승심, 그리고 여러 차례 보여준 여러 판단 착오 등으로 인해 카이사르에게 패배하여 몰락하게 되었다. 폼페이우스는 분명 카이사르를 상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장군이었고[* 정말이다. 로마 및 히스파니아에서 카이사르는 같은 로마 장군들을 상대로 폼페이우스를 제외하면 전승을 거뒀다. 로마 내전 당시 카이사르에게 국지전에서나마 패배를 안겨준 건 폼페이우스 뿐이다.] 디라키움 공방전에서 카이사르군을 보기 좋게 격퇴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가 내전 상황에서 보여준 약간의 판단 착오들은 카이사르라는 걸출한 장군을 상대로는 중대한 손실을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 폼페이우스는 몰락하고 공화정 말기의 역사적 승자는 카이사르가 되었다. 정리하자면, 군사적인 능력에서는 카이사르에 맞먹을 정도로 뛰어났으나 정치적인 능력, 특히 인간 심리를 헤아리는 부분에서는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이 점이 폼페이우스의 몰락과 죽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제패라는 위업을 달성하고 그의 업적이 이탈리아 전체를 휩쓰는 시점에서 대놓고 그를 적대하는 건 그다지 타당하지 않았지만 폼페이우스는 이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였고 [[동맹시 전쟁]]의 여파까지 겹치면서 내전이 시작되자 아무 저항도 못해보고 이탈리아를 그대로 카이사르에게 넘겨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폼페이우스의 최후 역시 이런 인간 심리를 헤아리는 부분이 떨어져서 발생한 결과인데, 폼페이우스가 살아있는 이상 어디로 가든 내전이 계속될거라는 건 분명했다. 그런데 자기 세력권으로 있는 아프리카를 내버려두고 굳이 망명지로 이집트를 골랐다는 건 이집트를 자기 손에 넣고 내전을 계속하겠다는 의도로 볼 수 있었다.[* 당장 아프리카와 시칠리아를 본거지로 한 폼페이우스의 둘째 아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거의 심 년 정도를 옥타비아누스와 맞서 싸웠다는 점을 생각해보면(이것도 결국 옥타비아누스는 섹스투스를 결국 물리치지 못해서 정치적 공세를 통해 해결한다.) 굳이 이집트에 갈 필요가 있었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 그런데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오늘내일 하는 상태일 정도로 안 좋았지만 엄연히 수백년간 이어져 내려온 왕조였으므로 폼페이우스의 의도대로 움직일 리가 없었다. 파트리아-클리엔테스 관계를 생각했을 수도 있겠으나, 이집트라는 하나의 왕조가 몰락해버린 개인을 상대로 의리관계에 매일 거라고 보는 것도 무리수에 가까웠고 결국 목숨을 잃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